2008년 5월 31일 토요일

모든 것의 99.999%는 빈 공간 Ⅱ


모든 것의 99.999999%는 빈 공간 Ⅱ
::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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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 문명은 역사의 가장 강력한 두 가지 힘, 즉 과학과 종교가 서로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 사람들은 산의 정상에서, 바다의 거대한 파도에서, 기나긴 강의 흐름에서, 대양의 광활한 항로에서, 별들의 움직임에서, 경이로움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경이로움 없이 지나쳐버린다. - 聖 아우구스티누스
  •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나 우리에게 보이는 모든 건 꿈속의 꿈일 뿐이다. - 에드거 앨런 포
  • 모든 물질은 안정된 빛의 덩어리일 뿐이다. - 슈리 오로빈도
  • 출처 : 과학에서 신으로(피터 러셀 지음)

| 빈 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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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페터 뒤르:1943년 만하임 출생. 현재 브레멘 대학에서 문화사와 민속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물질을 이루는 원자의 99.999999%가 빈 공간* 주1)이라는 과학자들의 측정이 확실하다면
  • 내가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내 속에 있다고 해도 타당하다.
  • 그대가 전 우주이고, 그대가 일체 안에 있고 일체가 그대 안에 있다. - 스와미 묵타난다
  • 내 안에서 현상학적으로 생성된 우주는 나로 인해 널리 퍼져간다……. 세계가 나에게서 태어나, 나에게서 존재하고 나에게서 사라진다. - 아슈타바크라 기타
  • 마음이 물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물질이 마음에서 나온다. - 티베트 대해탈의 서書
  • 모든 물질은 안정된 빛의 덩어리일 뿐이다. - 슈리 오로빈도
  • 만물은 보이는 대로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 능가경
  • 내가 神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사고)함으로써 神이 생겨난다고 말해도 타당하다.
인간의 호기심으로 인해 과학이 발전해온 것이 사실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근원을 캐내기 위해 각 분야에서 열심이지만, 인간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근원을 알고자 하는 가없는 욕구는 어쩌면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 주1)
물질을 이루는 원자의 99.999999%가 빈 공간
……중략……우리는 물리적 실재를 정확히 모르면서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근본적 실재의 본질을 밝히려는 건 많은 과학적 연구의 목표였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그런 움직임을 지배하는 많은 법칙과 원리를 밝혀왔다. 그러나 아주 묘하게도 과학자들이 참된 본질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은 물리적 실재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중략……
2천 년 동안 원자(原子)를 원소의 최소단위로 생각해왔고, 이 모델은 일상경험을 통해 쉽게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이 원자가 전자, 양자, 중성자와 같이 더 작은 소립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궤도를 선회하는 전자에 둘러싸인 중앙핵이 있는 모델로 바뀌었다. 이것 역시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원자의 지름은 1인치의 10억분의 1에 불과하여 아주 작은데, 소립자는 그보다 더 십만 백나 더 작다. 원자의 핵을 쌀알 크기로 확대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원자 전체는 축구장만 할 것이고, 전자는 축구장의 스탠드 주변을 날아다니는 쌀알 크기만 할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물리학자인 아서 에딩턴 경이 말한 것처럼, "물질은 대부분 섬뜩할 정도로 빈 공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99.9999999퍼센트가 빈 공간이다.

물리적 실재가 주로 빈 공간이라면, 세계는 왜 실체가 있고 단단한 것처럼 보일까? 내 손의 99.9…퍼센트가 빈 공간이라면, 왜 테이블 위의 손이 99.9…퍼센트 빈 공간인 테이블을 통과하지 못할까?
이것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전자가 핵 주변을 아주 빨리 돌아서 다른 입자들이 통과할 수 없는 불가입성(不可入性) 전자각(電子殼[껍질 각])을 이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 주변을 줄에 매달린 추가 빠르게 돌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접근하지 못할 텐데, 그 이유는 돌아가는 추가 당신의 접근을 막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두 개의 원자가 만날 때에도 그 전자의 궤도가 있어서 서로 통과하지 못하고 그들은 단단한 공처럼 작용한다.

양자론이 등장하면서, 물리학자들은 소립자조차도 결코 단단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사실 소립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과는 다르다. 소립자를 분명히 설명할 수도 없고 정확하게 측정할 수도 없다. 대부분 소립자들은 입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파동처럼 보인다. 소립자들은 일정한 위치도 없고 뿌연 구름과 같은 잠재적 존재인 것 같다. 어떤 물질이든, 실체는 거의 없다.

출처:과학에서 신으로(피터 러셀 지음) 3장. 실재에 대한 착각(p64 ~ p66)

| 꿈과 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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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의 창시자이다. 1875년 스위스 북동부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꿈이란 무엇일까?
어젯밤 꿈에 연예인 L씨와 데이트하는 꿈을 꿨다. 평소에 L씨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고, 당연히 이상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TV와 인터넷에서 가끔 스쳐봤을 뿐이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꿈에 나타나서 데이트까지 하다니……. 현재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평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이니……. 흠모하는 김지수씨랑 데이트하는 꿈이었다면 조금은 마음이 다르게 흐르고 있겠지만;; 어쨌든 꿈은 그냥 꿈일 뿐이다.
생각하기에 꿈이라는 것은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뒷통수 맞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꿈이란 것은 도무지 컨트롤 할 수도 없고, 취사 선택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자각몽이란 꿈도 있다는데, 그건 그걸 믿는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라 여긴다. 설령 자각몽이란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완벽하게 컨트롤이 된다고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꿈을 100% 컨트롤 가능하다면 그건 神의 권능이지 사람의 능력은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얘기가 옆 길로 샛는데, 꿈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실재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가끔 꿈해몽이라는 미명 아래 꿈을 해석하려고 든다. 하지만 꿈해몽이나 꿈해석은 모두 부질 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게 미신이든, 정신 심리 차원의 얘기든 부질 없는 일이다. 인간이 만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바라보며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갖고 현상의 원인을 알고자하는 욕구도 꿈이 현실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알려고 하는 것처럼 부질 없는 노릇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특징이 바로 '호기심' 혹은 '앎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필자는 동물행동학 학자가 아니므로 다른 동물에게도 인간과 유사한 '호기심'이라는 것이 있는지 그리고 호기심에 준하는 행동을 하는지 현재로선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전무하다. 한마디로 백지상태다. 하지만 듣기로, 호기심이란 것은 I.Q와 관련성이 많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고, I.Q가 높은 침팬지, 오랑우탄, 돌고래등의 동물에게서 인간과 유사한 '호기심' 행동이 보인다는 얘기도 얼핏 들었던(읽었던 건가?) 기억이 난다. 최재석 교수의 묘심(猫心 고양이의 마음)이란 글을 보면 고양이에게도 호기심이란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설령 다른 동물에게서 인간의 호기심과 유사한 행동 양식이 나타난다고 하여, 그것이 인간의 호기심과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호기심이 생기면 그것이 왜 생겼는가? 알려고 하는데 그치지 않고, 대부분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어떤 원인으로 파생된 호기심이란 동기를, 자기화 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 자기화의 과정이 쌓이고 쌓여 전승된 결과가 인간의 지식내지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동물행동학 분야는 문외한이라 이만 줄입니다.)

만일 神이라는 절대자가 진정 물질적, 현상적으로 실재한다면*주2) 神은 지구상의 숱하게 많은 생물종 중에서 왜 유독 인간에게만 이렇듯 "지(知, 앎, 호기심)에 대한 욕구"를 심어줬을까?

다른 한편으로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만일 神이라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장구한 시간이 흐른 먼 미래의 어느 날 인간은 만물의 기원을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과 기술이 우리가 神이라 호명하는 존재의 능력만큼 발전하면 인간은 스스로 神이 된다고 봐야하는 것일까?)

만일 그런 神적인 능력을 갖게 된다면 그 다음에 인간은 뭘 하게 될까?
지금 神이 아무것도 하지 않듯이 그렇게 아무 것도 행하지 않게 될까? (우리가 절대자라 부르는 神은 가시적 차원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듯 하다.)
TV시청하는 시청자의 입장처럼 채널 돌려가며 묵묵히 감상만 하고 계실까?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된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는 아닐 것이다.*주3)

우리는 간혹 무엇이든 타인을 월등히 능가하는 능력(쉽게 비교해서 초능력자 같은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되면 그 능력을 이용해서 뭐라도 대단한 일을 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물론 어떤 이는 그 능력을 활용해서 대단한 일을 벌이기도 하고,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적절히 이용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그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神이나 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호기심으로 인해 한 때 자랑삼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그 능력이 자신의 삶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그 능력을 내비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유추해보면 우리가 神이라 호명하는 절대자도 자신의 능력에 회의감을 느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무위의 행을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이 진화론자들의 생각처럼 어느 순간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고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神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가 어느 날 호기심이 생겨나서 창조라는 행위를 통해 만든 것이라면, 그리고 인간이 神의 형상과 마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인간이 그러하듯이 神 또한 자신의 피조물의 행위에 염증이 났을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갖게 되더라도 그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새로운 장난감을 갖기를 갈구하듯이 神도 어쩌면 개구쟁이 어린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충만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 주2) 실재한다면 : 종교적으로는 실재하시고 항시 역사하신다고 굳게 믿음. 여기서 '실재한다면'이라고 가정법을 쓴 것은 종교적 신념은 잠시 배제해두고 무신론적 사고로 돌아가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는 의도이다.

* 주3) 도덕경에 이르길 무위라는 말이 있는데, 무위란 '행함이 없이 행한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기 위한 행함은 진정한 무위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행하는 것이 무위다. 어쩌면 神 또한 그러하게 행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 신(神)이란 무엇일까?
신 神(GOD)이란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자연계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화복(禍福)을 내린다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초월적인 존재.

:: 신의 기원설
우리가 神이라고 호명하는 존재에 대한 기원설은 의외로 많다.
  1.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설: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쟁이 있어 왔다. 대표적인 것만 몇 가지 새기면 다음과 같다.
    • 신은 완전한 것인데, 만약 ‘존재’라고 하는 요소(要素)가 빠지면 신은 불완전하게 되므로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본체론적(本體論的) 증명.
    • 자연계에 있는 것은 모두 인과(因果)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므로 인과관계를 더듬어서 점차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최후에는 제1원인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우주론적 증명.
    • 천체(天體)가 질서정연하게 운행하고 있는 것은 목적이나 의장(意匠)을 창출한 신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목적론적 증명 등이다.
    • 지배자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서 신이 생겼다고 하는 정치적 발명설
    • 공포가 신을 창조하였다고 하는 공포기원설(恐怖起源說)
    • 신이 존재하고 있는 양 행동하는 편이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허구설(虛構說) 또한 이들을 비판한 역사적 증명, 도덕적 증명, 체험적 증명 등도 있다. 이를 부정하는 측의 대표적인 것은 직접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유물론(唯物論) ·무신론적 실존주의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등의 입장에서 주장된다.
      [참고:엔사이버 백과]

  2. 인터넷과 내 마음에서 분리수거한 뒤 다시 섞어둔 -.-; 설들
    • 무신론자와 진화론자의 주장대로 神은 애시당초에 없었거나,
    • 공포심 때문에 기대기 위해 만들었거나,
    • 뇌가 만든 환상이거나(의학계에서 새로 나온 가설),
    • 神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버렸거나,
    • 神은 믿는 자의 마음 속에서만 나타나시거나(혹은 인간의 뇌 속에 터를 내리고 계시거나),
    • 神은 고차원의 생명체이거나(어쩌면 인간의 뇌는 神과의 생명네트워크[Bio-Network]일지도?),
    • 우주 자체가 神이거나,
    • 이 세상은 매트릭스이고 神이란 프로그램의 버그이거나,
    • 범신론에 입각하여 神은 만물 속에 스며 계시거나,
    • 무위행을 하고 계시거나,
    • 고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아틀란티스(Atlanits), 뮤(Mu) 같은 초고대문명의 인류가 神의 시원일까?
    • 아주 머언 옛날 지구상에 생명의 씨알을 뿌려놓고 저 깊은 우주 어디론가 떠나버린 외계인들은 지구라는 행성을 까마득히 잊고 있거나,
    • 인류가 알 수 없는 고차원 세상에서 UFO라는 이동수단을 이용해 다니면서 주시하고 있거나,
    • 또다른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신의 존재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해답은 아직껏 제시되고 있지 않다는 거…….
당신은 무신론자인가? 아니면 유신론자인가? 불가지론자인가? 회의론자인가? 외계인 추종자인가?

:: 나가며
마이클 베이 감독의 2005년 영화 '아일랜드' 중에 神에 대한 조크 joke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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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God?
링컨 6-에코:신神이 뭐야?

Well, you know when you want something really bad and you close your eyes and you wish for it?
맥코드:신神이 뭐냐고? 원하는 게 있으면 눈 감고 소원 빌지?
God's the guy that ignores you.
그걸 무시하는 작자.

내가 맥코드 였다면 다르게 얘기해줬을 것 같다.
나:신神이 뭐냐고? 힘들고 외로울 때도 다시 일어나 살아갈 힘을 주는 분. 믿거나 말거나 너와 내가 존재하는 이유.
물론 뻔하고 재미없는 대답이다! 잊기 쉽지만 진리는 뻔한 것이다. 그래서 자주 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당장 귀에 솔깃한 것들 대부분 사기성이 짙더라. 살아보니 그렇더라.
당신 안의 신성은 깨어있는가?

2008년 5월 24일 토요일

신의 첫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제가 머무는 어느 커뮤니티 자게에 심각한(?) 글이 올라왔습니다.

신이 태초에 존재했다면… 이라는 제목의 글이며,
신이 태초에 존재했다는 가정하에 생각해봅니다.
신이 태초에 존재했을 때 최초의 생각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래는 저의 단평입니다.
 
[너스레]
'인격신이냐, 범신론적 자연신이냐....'하는 신에 대한 범주와
또 어느 종교의 범주 안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답이 나올 수 있을 듯합니다.

질문하신 님의 범주는 무엇인가요?

사실 어떤 범주에서 얘기하건 정답은 없는 것이고,
어차피 각자 유추(특정 교리체계이건 개인의 사념이건.)만 할 수 있을 뿐인 것이겠지요.
물론 이런 조건을 모르시고 대화를 유도하신 것도 아니겠지만요.

신이건 물질이건 추상적인 관념으로 도출되는 모든 생각의 시초건,
다시 말해서 모든 만물의 근원은 인간의 능력 밖의 문제일 겁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철학과 과학을 필두로 한 모든 학문이
인간 지력이 한계에 달하는 때*주1)가 어느 땐가는 분명히 올 것이지만
결국 인간은 만물의 근원에 대한 답은 영원히 알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란 의문부호에서 시작해서 학문이 발달(?)되어왔지만
그 끝은 느낌표가 아니라 결국은 숱하게 많은 의문부호만 양산해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종래에 가서는 의문부호에 짓눌려서 모든 학문은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학*주2)으로요!

아주 오래전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바라보시던
별 총총한 밤하늘,
아침이면 여지없이 떠오르는 태양,
자신들의 2세가 태어나던 날의 환희,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시시때때로 접하던 모든 경이로움들에 찬탄하고 고개숙이던 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념없이도 가물가물한 밤하늘 저 너머를 깊이 주시하며
이 우주 만물과 모든 현상을 만들고 운영하시는 '절대자'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고 숭배하던
순전(純全)한 마음*주3) 어쩌면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족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 주1)
현재의 철학과 과학의 큰 테두리를 바라보고 있자면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캐낼 것도 없이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듯이 보이기도 하더군요. 물론 미시적으로 파고들면 세밀성은 아직 부족하지만, 거시적인 큰 틀로 보면 더 이상 새로운 걸 알아낸다는 건 힘들어 보입니다. 인간은 어쩌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창조되어졌고, 그 앎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발현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닐까? 하는 다분히 SF적인 상상이 들기도 하더군요.

* 주2)
종교의 궁극은 신학 神學(=信學)이 되지 아닐까 싶습니다. 만일 인격신이 더 이상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래서 재림이건 현현이건 어떠한 형태로건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성을 내비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인간으로선 신을 믿는다는 것도 하나의 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2~3세기에 신학의 틀이 태동했다고 하고, 중세시대 때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신학은 유대교를 근저로 한 기독교 신학 하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모든 종교와 절대자에 대한 연구로 그 범위를 확장해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신학은 지속적으로 연구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이란 특정종교의 신학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가 절대자라고 생각하는 '신에 대한 학문'을 지칭합니다.

* 주3)
'온갖 논리에 물들지 않은 깨끗하고도 완전한 믿음의 상태'로 풀이하고 싶습니다. 참다운 믿음은 갓난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의 마음 상태가 아닐까요. 나이가 들고 지식을 익혀가며 순전했던 마음은 지식이란 좀벌레에게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주3-1)요.

알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식은 득보다는 해가 될 여지가 남아 있듯이, 믿음 또한 절대적 믿음*주3-2)이 아니면 득보다는 해가 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주3-1)

지식불용론자는 아니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지식을 익히며 살아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인간사회에서 알몸으로 자연 속에 내던져졌다면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만한 문명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 주3-2)
절대적 믿음은 내 믿음만이 최고라는 광신과는 구별되는 믿음입니다. 예전에 한 번 내비췄던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100% 믿는 마음가짐의 상태를 절대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중 '절대적 믿음'을 가진 형제,자매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2008년 5월 21일 수요일

사람은 날 때부터 이미 완성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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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성공'이라 부르는 것도 그것이 목표가 될 수는 있고,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목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했다고 하여 그 사람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산을 오를 때는 정상을 쳐다보며 오르지만 계곡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부터는 자신의 발 앞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정상이란 神에게 묵념이라도 드리는 자세이다.

삶을 옳바르게 영위해나가기 위해서는 뭔가를 이뤄 보려는 욕망이라면 욕망이랄 수 있는 목표의식이 필수요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의식이 도리어 삶의 독소가 되기도 한다. '과욕'을 내면 그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해를 입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재차 되뇌이지만 '사람은 날 때부터 이미 완성된 존재이다!'
이런 표현을 쓴다하여 '목표의식', '욕망'을 지금 당장 버리고 살자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이미 완성된 존재!'라는 명제의 내포된 뜻은 삶에 지쳤을 때 새로운 활력소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다.
뭔가를 열심히 하여 성취했다면 자신만이 특출한 능력을 갖춰서 이룬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느 누구나 이룰 수 있지만 여러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남보다 조금 일찍 지름길을 발견한 것 뿐이리라.

흔히 이른 나이에 성공가도를 걷기 시작한 분들의 노년의 자서전이나 대담을 보면 공통분모처럼 나오는 얘기가 있다.
"돌이켜보면 자신은 놓친 것이 너무 많았다……."
그 분들이 놓쳤다고 말하는 것은 현재 자신에게 없는 것이거나 부족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놓친 것들의 목록에 물질적인 것은 전혀 없다시피 하고, 대부분이 추상적인 그래서 정신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시간'과 연관지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 글의 화제로 제시한 '사람은 날 때부터 이미 완성된 존재이다.'가 참이라면, 이미 완성된 존재로서 세상에 와서 할 일이라곤 "시간(인생이라는 한정된)"을 운영해나가는 것이리라.

글의 말미에서 언뜻 생각하니
영어 명언 "Time is gold."의 내재된 뜻을 굳이 줄줄이 풀이해놓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17세기 신비주의 시인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는 '케루빔의 방랑자'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이 세상이 끝날 때
그대가 성취한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하여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되어
이 세상을 초월한다.

출처:프레데릭 프랑크 作 '태어나기 전의 나는 누구인가'


| 너스레 |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먼 후일 죽음의 천사 사마엘이 날 맞으러 오는 그날까지도 나는
몰랐었고, 모르고, 모를 것이다.
시간이 무엇이며, 시간의 神(Cronos*)이 어떻게 人生을 운영하는지를…….

* 시간의 神인 크로노스 Cronos는 뒷머리가 없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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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올림포스 신전에는 시간의 神인 크로노스 Cronos의 신상이 있었다. 이 신상은 벌거숭이 젊은이가 달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발에는 날개가 있고,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으며, 이마에는 곱슬 곱슬한 머리카락이 늘어뜨려져 있지만, 뒷머리와 목덜미는 민숭민숭한 모습이었다. 기괴한 모습이 우스꽝스럽지만. 그 아래에 시인 포세이디프가 노래한 것을 읽으면 우리는 엄숙해 질 수밖에 없다.

시간은 쉼 없이 달려야 하니 발에 날개가 있고.
시간은 창 끝보다 날카롭기에 오른손에 칼을 잡았고.
시간은 만나는 사람이 잡을 수 있도록 앞이마에 머리칼이 있으나.
그러나 시간은 지난 후에는 누구도 잡을 수 없도록 뒷 머리칼이 없다.
-시인 포세이디프 Poseidipp 作-

시간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절대자의 섭리이다. 시간은 인간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계획에 따라서 움직인다.
(초중성당 주임신부 김훈일 신부님의 글에서 차용)

2008년 5월 19일 월요일

관계에 대하여

맞춰주길 바란다면 내가 먼저 맞춰줘야 한다.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댓가(값)를 치뤄야 한다.
원하는 것만 취하고 댓가(값)를 치루기 싫어하는 자를 세간에서 칭하길 '도둑'이라고 한다.
'원하는 것'의 범주는 비단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리라.

살다보면 이곳 저곳에서 얽히고 섥혀, 원해서건 어쩔 수 없는 외압으로 인해서건 '도둑'의 무리가 되는 경우가 한 두번은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 접하면 사람들은 '백이면 백' 어떤 이유를 내세워서건 '자기 합리화'를 해서 양심을 속이기 시작한다. 그 '자기 합리화'의 뻔한 레퍼토리는 '남도 다 그렇게 사는데…….' 이다.

소위 얘기하는 '남도파'를 간혹 접할 때마다, 대체 왜 그렇게 사나 모르겠다. 유사이래로 사람들은 전부 죽었는데, '남도파'들도 어차피 죽을 건데, 뭣하러 그러고 사는가 모르겠다. 세상 오염시키고 자기합리화나 하며 살려면 그냥 일찌감치 밥숟가락 내려놓으슈!

주체성이라고는 뭐에 쓸려고 해도 없는 정신머리의 사람이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헛깨비일 뿐이니, 일찌감치 먼저 가세요. -.-+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짜증 지대로인 인간이 그만큼 자꾸 생겨나는 것인가 보다. 컴퓨터 에러 코드야 찾아서 고쳐 쓰기라도 하지... 인간도 고쳐서 사용가능할까? 위인이라는 분들께서는 심성적인 하자 있는 사람이라도 웬만하면 고쳐서 사용가능하다고 주장하시니, 그런가부다! 는 느낌은 들긴 하지만, 난 위인이 될 인물이 못 되는 사람인지 사람은 수리가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실제적으로 졸업 후 사회에 나와 20여년간 인간 관계를 맺어온 경험에 의하면, 때 놓친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 되두만요. 참으로 안타깝지만 위인들의 말은 그냥 어쩌다보면 개중엔 한 두명 정도는 개과천선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인 듯 하더군요. 그리고 경험에 의하면 시간의 때가 많이 낀 오래된 사람일수록 수리될 확률은 0에 수렴하는 것 같습디다.

사실 타인의 잘못을 품을 줄 모르는 나 자신도 그 0에 수렴하는 부류 쪽에 가까운 것 같다는 자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들때면 정말 나 부터 밥숟가락 내려 놓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다.

2008년 5월 12일 월요일

지구에서 온 사나이 The Man From Earth (2007) [★★★★]

지구에서 온 사나이 The Man From Earth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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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줄거리
교수직을 사직하고 떠나려는 어느 역사학자의 집에 송별파티를 해주러 동료들이 모여든다. 생물학자, 인류학자, 신학자, 고고학자인 이들에게 역사학자는 시간에 관한 아주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1998 년 작고한 미국의 SF단편 소설가이며 환상특급(Twilight Zone)의 작가였던 제롬 빅스비(Jerome Bixby)가 38년이라는 세월을 걸려 완성한 각본을 리차드 쉔크만 감독이 영화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아주 작고도 장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단 외견상으로 보면 이 영화의 모든 부분은 존 올드맨(John Oldman)이라는 역사학 교수가 사직서를 내고 집에서 짐을 챙기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다른 학과의 교수 친구들이 먹을 것을 가져와서 갑자기 떠나버리는 존과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모인다. 이들을 모든 것이 안정적인 올드맨이 왜 떠나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다그쳐 묻는다. 교수직에 10년간 있으면서 학교과 학생들에게 인정도 받았고 친구도 생겼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로, 무엇을 하러 떠나는 것인지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진실인지 픽션인지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약 1만 4천년전에 태어난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인류학적으로 그 당시와 지금의 인류는 동일한 종이기 때문에 외견상 구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는 어땠을까? 어떻게 그 사람, 바로 존 올드맨은 1만 4천년이란 세월을 알 수 있었을까?

동료 교수들은 학자들 답게 이러저러한 질문을 던지며 논리의 헛점을 캐내려하지만 틈은 없어보인다. 그는 부처를 만나 가르침을 얻었으며 보스톤에서는 화학교수를 했었고, 고호의 친구였으며 그로부터 그림도 한점 얻었다. 10년주기로 떠나야하기에 신분증을 위조하다가 감옥에 갖히기도 했다. 그의 친구들은 이제 이 말을 믿어야할지 안 믿어야할지 알수가 없게 된다. 그가 정신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 만으로는 석연치가 않다.

:: 감상
※ 스포일러 있습니다.
여기에 영원히 시간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다. 고고학에서 얘기하는 선사시대의 크로마뇽인이 바로 자신이며, 한 때 자신이 예수였다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있다면 당신은 그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허풍장이나 거짓말장이, 혹은 정신병자라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그의 논리 정연한 말에 혹해서 사실이라고 여기겠는가?

만일 그가 허풍장이나 거짓말장이가 아니고 정신병자도 아니라면 어떨까?
그의 머리속에서 그가 1만 4천년 동안 살아왔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실재였다면 어떨까?

실재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외부에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물리적 실재가 있고,
둘째는 우리 각자가 경험하여 마음으로 재구성한 개인적 실재이다.
그리고 이 둘 다 진짜 실재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각인된 주관적 실재(개인적 실재)가 착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그것은 모두 마음의 산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이며,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유일한 실재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와 물자체인 물리적 실재를 혼동할 때 착각이 일어난다.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자들은 이러한 혼동을 마야(maya)라고 했다. 마야를 세계에 대한 잘못된 지각인 착각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세계에 대한 잘못된 믿음인 '환영(幻影)'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가 마음의 상을 외부 세계라고 생각할 때 환영이 일어난다. 우리가 본 나무를 나무 자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능가경'에 이런 말이 있다.
"만물은 보이는 대로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출처:「과학에서 신으로 (피터 러셀 著)」'세계에 대한 잘못된 믿음, 마야' 中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게 우리 마음에 나타난 감각상(感覺像)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지각을 지지하는 물리적 실재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가정에 불과하지 않을까? 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은 그럴듯해 보인다. …… 중략 …… 우리는 물리적 실재를 정확히 모르면서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근본적 실재의 본질을 밝히려는 건 많은 과학적 연구의 목표였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그런 움직임을 지배하는 많은 법칙과 원리를 밝혀왔다. 그러나 아주 묘하게도 과학자들이 참된 본질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은 물리적 실재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말에 너무 놀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의식 형태와 특성뿐이라면, 이런 것들은 근본적인 물리적 실재를 기술하는 적절한 모델이 아닐 것이다.

출처:「과학에서 신으로 (피터 러셀 著)」'알 수 없는 실재' 中에서


인류는 죽음이라는 불치병에 걸렸고, 이 병은 그 누구도 스쳐지나 갈 수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1만 4천년 동안 죽지 못하는 병(불사병, 不死病)에 걸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영원을 견뎌낼 것인가?

영화를 본 후 "산다는 것은 어쩌면 기억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마니아를 위한 세계SF걸작선(도솔 출판사 간행) 609 Page

※ 이 영화는 과학적으로는 진화론적 사상을 밑바탕에 뒀으며, 종교적으로는 철저히 반기독교적인 영화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신이 극렬한 기독교인이거나 광신도라고 판단되는 분들은 감상하시면 상당히 열 받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웬만하면 안 보시길 권합니다.

기독교인이지만 열린 시야를 가진 진보적인 신앙관을 가진 분들이라면 보시는 데 크게 지장은 없을 걸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종교를 사람이 만든 신념 정도로 여기는 분들은 재밌게 보시겠구요.
무신론자이면서 기독교를 인류의 적이라고 여기는 분들께는 쌍수를 들어서 추천해드립니다. -.-;

영화의 성격상 우리나라 영화관에서 개봉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독교인 중 99%가 근본주의인 나라에서 반기독교적인 영화를 개봉하는 건 자폭행위나 마찬가지일테니……. "다 빈치 코드"도 개봉을 했으니, 또 모를 일이긴 하네요. 흥미로운 소재의 영화이긴 하지만, 흥행과는 동떨어진 영화이기도 하니 국내개봉은 좀 어려울 겁니다. 어둠의 루트로 다운받아 보셔야할 듯합니다.

반기독교적인 사상이 밑바탕에 깔린 영화이지만, 종교적 성향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평가해보면 저예산 영화임에도 상당히 수준있는 괜찮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 영화의 말미에 반기독교적인 내용이 나오지만, 반종교적인 영화로 보기보다는 'Sci-fi 영화'라고 보고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관련 영상과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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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오른쪽으로)
-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한 "케이 팩스 (K-PAX, 2001)"라는 영화이다.
└ 유사한 주제를 다뤘다. 케이 팩스의 주인공은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히말라야에서 만난 예수의 흔적 Jesus in the Himalayas"
└ 성서에서 언급이 없는 예수의 사라진 유년시절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다큐.

- 예수는 神話다: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공저)
└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저자가 '예수는 신화다'를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썼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상적 기반이라고 해도 될만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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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프럼 어스 The Man From Earth (2007)

ㆍ감독:리차드 쉔크만 Richard Schenkman
ㆍ각본:제롬 빅스비 Jerome Bixby
ㆍ출연:존 빌링슬리 John Billingsley, 엘렌 크로포드 Ellen Crawford

2008년 5월 10일 토요일

광우병과 「시인과 촌장」의 풍경

:: 광우병 관련 영상들
- KBS 스페셜 2006년 10월 29일에 방영 - "얼굴 없는 공포 광우병 미국 쇠고기 보고서"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2007년 5월 19일에 방영 - "광우병 괴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진실게임"
- MBC PD수첩 2008년 4월 29일 방영 - "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 MBC 100분 토론 2008년 5월 8일 방영 - "미국산 쇠고기, 안전한가"
- KBS 미디어 포커스 2008년 5월 3일 방영 - "광우병 불안 확산…엇갈리는 언론"
- KBS 미디어 포커스 2008년 5월 10일 방영 - "엇갈리는 광우병 보도…혼란스런 국민"
- KBS 생방송 심야 토론 2008년 5월 11일 방영 - "재협상 가능한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
- KBS 취재파일 2008년 5월 11일 방영 - "10대 왜 촛불을 들었나?"
- 단편 애니 'Meatrix' 시리즈

듀엣 「시인과 촌장」이 부른 "풍경"이란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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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장형 축산업의 문제점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자본의 논리에만 급급해서 자연을 거스르니 문제가 자꾸 양산되는 것이다.

자연 역행 행위는 비단 '광우병'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인간과 다른 생물이 공존할 수 있는 해결책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이미 공존의 방법이 있음에도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욕망으로 인해 그 방법을 덮어두고 있는 것일까?

:: 전세계 통일법을 만든다면
난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인류가 아직도 '국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해 국경을 가로질러 놓고 살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고, 조금씩만 양보하면 굶어서 죽는 사람들은 없을 터인데도, 한 곳에선 음식쓰레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한쪽에선 기아로 인해 사람이 죽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각종 기아대책기구를 만들어 원조를 할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법을 하나로 통일하고, 그 통일법 체계 속에서 세계를 운영해나가면 산적된 수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될 터인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제 호주머니 챙기기 바쁘면서 2세들에겐 버젓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 운운하며 가르치는 이중성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대체 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의식 속에 '너와 나'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이중성이 생겨난 것일까? 우린 잘 났거나 못 났거나, 잘 살거나 못 살거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한 가족(광의적으로 보면 진화론이건 창조론이건 이건 동일하다)인데, 왜 다들 제 종(핏줄)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들일까?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이상주의 국가론은 왜 실현되지 못할까?
어쩌면 이러한 문명비판적인 사고 방식은 필자가 현실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이상주의여서 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상주의자는 참으로 많았다. 희랍의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장한 이상적인 국가 형태도 있었고, 노자가 도덕경에서 내비친 최소의 이상적인 국가 형태도 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을 그리기도 했고,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공산주의'라는 이상국가론도 있었다. 이렇듯이 예로부터 현자들은 수 많은 이상사회를 그려왔다. 하지만 문명사회는 이상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고, 급기야 자본의 논리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자본이 세상을 움직이는 세상이 되면서 부터 인간사회는 자연과 한층 더 멀어져가고 있다. 자본의 논리와 인간의 욕망은 합일점에서 만났고, 아주 찰떡궁합인 것 같다.

인간의 욕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자연의 생산력은 한정되어 있다.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생산체계가 발전함에 따라서 자본가의 이익은 더욱 늘어나지만, 자연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인간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자연은 결코 정복할 수도 없고, 다스릴 수도 없는 것인데도 일부 자본가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연은 망가지고 있다. 자연의 망가짐은 또다시 생명의 순환에 돌이킬 수 없는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나날이 사라져가는 생물종들, 한 번 멸종하면 다시는 되살릴 수 없는 것이 생명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종들과의 공존의 길을 모색하려는 사람들과 단체는 태부족이고 지구상 어딜 가나 자신의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저급한 의식을 가진 '의식의 유아들'만이 넘쳐난다.
눈에 보이지 않게 흐뜨려져가는 자연 파괴, 자연 파괴는 인류 멸망과 동의어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아는 것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어 가는 인류문명을 바라보고 있자니, 늘어나는 건 한숨뿐이다. 광우병에서 인류멸망으로의 의식 전개가 확대해석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인류의 자연 파괴와 역행으로 인한 문제는 광우병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만행을 전부 열거할 수도 없고 열거할 자료가 있다고 해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열거하면 뭣하겠는가, 누워 침뱉기인 것을.


:: 인류는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살특급열차'에 실려가는 승객
자연 파괴를 멈추는 방법은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이 나선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미 인류는 자멸의 길로 들어섯고 그것을 멈추거나 되돌릴 시간을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옛날 지구를 호령하던 '공룡'이 하루 아침에 멸종했듯이 '인류'도 멸망의 임계량을 넘어선 순간 하루 아침에 멸종해버리지 않을까 싶은 우려까지 생긴다. 잘못을 가늠할 수 있는 사리판단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행되고 있는 자연 파괴. 인류는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는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살특급열차'에 실려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열차의 종착지는 '멸종'이요, 그 열차의 출발지는 '욕망'이었다. 지금이라도 인류의 공통의식에 변혁이 일어나서 '욕망'의 사슬을 끊고서 자연과 공존의 길을 함께 모색해나간다면 열차의 종착지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을 끊는 것은 '자살'만큼이나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자살'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인류를 실은 '욕망이란 이름의 열차'는 오늘도 쉬지 않고 달린다. 멸종이란 종착지를 향하여…….

…… 먼 후일 ……
미래의 어느 날 창조주께서 재림이건 현현이건 혹은 어떠한 형태로든 오셔서, 이 지구에 뿌려놓은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꼴을 보신다면 대체 어떤 느낌을 받으시고, 어떤 행동을 취하실까?

창조주께서는 틀림없이 어우러져서 함께 잘 살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두셨는데, 어느 날 잠시 시찰 와서 보니 이 지구를 인간들 혼자서 독식하는 정도를 떠나 온갖 파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시면 과연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실까?
각자의 마음으로 살펴볼 일이다.

※ 정치논쟁, 종교논쟁하자는 글이 아니지만, 종교색이 들어간 글이라 덧글과 트랙백은 막아둡니다.

2008년 5월 8일 목요일

개소리? 사람 소리?

말하지 않는다 하여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안다고 하여 전부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보처럼 보인다 하여 내면마저도 바보인 것은 아니요,
똑똑해 보인다 하여 속마저 똑똑한 것도 아니다.

행색이 거지처럼 추리하다 하여 가난한 것도 아니고,
행색이 왕자처럼 휘황찬란하다 하여 부자인 것만도 아니다.

말하는 것이 어눌하다 하여 멍청한 것도 아니요,
달변을 구사한다 하여 명석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항상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사람과 현상을 판단하여 곡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실체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지금 당장 내게 유익하다하여 마냥 좋아할 것도 아니요,
지금 당장 내게 불편을 준다하여 안 좋게만 여길 것도 아니다.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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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 나타나게 된 근원을 살필 줄 아는 안목을 길러야 하리라.

진실은 안개 너머에 있다.
현상의 안개가 사라지기를 차분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안개 너머에 가려져 있던 실체를 볼 수 있다.
안개에 가려진 흐릿한 허상에 흔들리지 말라.
명심, 재차 명심할 일이다.

너의 눈도 귀도 심지어 마음조차도 믿지 말고, 현상을 직시할 줄 아는 인내를 길러라!
그리하면 언젠가는 영안(靈眼)이 눈을 뜰 날이 올 것이리라!
영안이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은 네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임을 알게 되리라!
더불어
네가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네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타인의 말에 수긍도 반대도 하지 말라.*
타인의 말 보다는 너의 참된 눈(靈眼)으로 바라봐야 한다.

* 만물은 보이는 대로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 능가경
어쩌면 필자의 이 글 또한 개 짖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소리라고 똑같은 개소리는 아닐 터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심심풀이 삼아 짖어대면 그런 걸 개소리라고 칭한다.
필자의 글이 개소리로 들리는가? 사람의 소리로 들리는가?

요즘 시절이 하수상하여
여기저기에서 개 짖는 소리가 너무 많이 들려와서
내 귀가 개 귀가 됐나 싶은 의심스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새겨둠.
아무 때나 짖어대지 말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