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4일 화요일

오캄의 면도날

오캄의 면도날 (Ockham's razor, 오캄의 면도칼)
'불필요한 다수성(Plurality)을 가정해서는 안된다(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cesitate)'. 이것은 중세 영국의 철학자이자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윌리엄 오브 오캄(William of Ockham, ca.1285-1349)의 말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다른 많은 수도사 처럼, 윌리엄은 청빈주의자(minimalist)로서 청빈한 인생을 보냈고, 또 성프란시스코와 같이,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교황과 논쟁을 시도했다. 윌리엄은 교황 요한12세에 의해 파문되었다. 그는 교황 요한을 이단이라는 논문을 써서 반론했다. (역주 : Plurality를 정확하게 번역할 수 없어서 다수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

중세 철학의 일반적인 원리인, 오캄의 면도칼은, 오캄 오브 윌리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원리를 윌리엄이 빈번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영원히 붙게 되었다. 현대의 우리들이 그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수도사인 윌리엄이 기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반론을 할 때,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오캄의 면도칼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떤 일이든 간에 형이상학적 존재를 추가로 논의에 개입시키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이 '불필요한 다수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unnecessary plurality)'를 사용한것은, 중세판 초능력(psi)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면, 피에르 아벨라르(Peter Abelard, 역주 : 프랑스의 철학가이며 신학자로 11세기 말에서 12세기에 활약했다.)의 '명제집 해설(Commentary on the Sentences)'의 제2권에서, 그는 '높은 등급의 천사는 낮은 등급의 천사보다 더 적을 것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깊은 고찰을 하고 있다. (역주 : 천사는 모두 9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그는 '불필요하게 다수성을 제시해서는 안된다'는 원리에 맞추어, 이 문제의 답이 '그렇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자연이 완전하면 할수록' 자연이 움직이는데 필요한 것들도 적어진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인용하고 있다. 이 원리는, 무신론자가 진화론을 선호하고 신-창조주의 가정을 부정하는데 지금까지 사용되어왔다. 즉, 만약 전능한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다면, 우주와 그 구성요소는, 더욱 단순해야 한다. 하지만 윌리엄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연 신학(自然神學 natural theology)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자연신학은, 신을 이해하는데 오직 추론만을 사용하며, 계시신학은 이것과 반대로 성서학적인 계시에 기초하고 있다. 오캄 오브 윌리암에 의하면, 신이라는 개념은 명백한 경험이나 추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모두 계시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신학의 근거는 신앙에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오캄의 면도칼을 정신세계 전부를 제거하는데 사용했지만, 오캄은 신앙고백서까지 '절약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있을 것 같다. 만약 그가 신앙고백까지 오캄의 면도칼을 사용했다면, 그는 존 톨랜드(神秘가 없는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1696)와 같은 소시니안(Socinian)이 되어,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의 양면성(역주 : 신이면서 인간임)을 하나로 정리했을 지도 모른다.

오캄은 철학의 청빈주의자로서, 당시 인기 있던 실재론(realism)에 반대하여, 유명론(nominalism)을 제창했다. 즉, 그는 보편(universals)이 마음의 밖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보편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개개의 사람이나 사물의 특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명칭을 말한다. 실재론자는, 개개의 물체와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개념의 배후에는 보편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캄은 이것을 너무 지나친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무엇을 설명하든, 보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유명론과 실재론, 어떠한 입장이든,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의 인간존재며, 또 소크라테스에 대한 관념을 나타낸다. 실재론자에 있어는, 또한 소크라테스의 인간성이나 동물성 등이 존재 하는 것이 된다. 즉, 소크라테스에 관한 성격 전부는, 각각 '실재(reality)' ,'보편' 혹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형이,eidos)가 있는 것이 된다. 윌리엄은 보편론적 세계관이라 불리는 이러한 다의적 세계에 회의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논리나 인식론, 형이상학에도 불필요하다. 그러면 왜 이러한 불필요한 다수성(plurality)을 가정하는가? 물론, 플라톤이나 실재론자가 옳을 지도 모른다. 현실의 각각 물체의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모델의 보편적 실체들, 즉 이데아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각의 사상이나 개념이나 지식을 설명하는데, 이러한 것을 전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과잉이며, 형이상학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불필요한 짐인 것이다.

죠지 버클리 주교는 물질적 존재(material substance)를 불피요한 다수성이라고 간주하고 오캄의 면도칼을 사용해서 제거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버클리에 따르면, 무엇을 설명하든 간에,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마음과 개념뿐이다. 그러나 버클리는 이 면도칼을 조금은 선택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성이 있었다. 주관적인 관념론자는, 신을 제거하기 위해서 면도칼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에 귀착한다. 유아론에서는 자기자신과 자기자신의 생각만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두가지뿐이라고 한다. 이것과는 반대로, 유물론자는 마음을 제거하는데 면도칼을 사용할 것이다. 우리들은 두뇌의 다의성(plurality of brains)과 의식의 다의성(plurality of minds)을 함께 가정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역주 : 죠지 버클리는 관념론자이며 물질주의에 대해서 반대했다. 유심론자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가지이며 하나는 실제론이고 다른 하나는 관념론이다.)

오캄의 면도칼은, 절약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라고도 불려진다. 최근에는 '설명은 단순한 것일수록 뛰어나다', '불필요한 가정을 추가하지 마라' 등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어쨌든, 오캄의 면도칼은 존재론 밖에서도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철학자는 정확한 정도가 비슷한 가설이 여러개 있을 경우, 가장 적합한 가설을 골라 내는데 오캄의 면도칼을 사용한다. 어떠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을 할 경우, 불필요하게 복잡한 가정을 세워서는 안된다. 폰 데니켄이 옳을지도 모른다. 즉, 지구밖의 생명체가 고대 지구인에게 예술이나 기술을 가르쳐 주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인의 기술이나 예술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우주인의 방문을 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 불필요한 복잡한 가정을 만드는가? 또, 많은 사람이 하는 것처럼, 꼭 필요한 가정만 만들어야 된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데 에테르를 가정할 수는 있지만, 굳이 에테르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럼, 왜 근거가 희박한 에테르를 일부러 가정하는 것인가?

올리버 호움즈(Oliver W.Holmes)와 제롬 프랭크(Jerome Frank) 는 '법(the Law)'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오캄의 면도칼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오직 사법적 판단만 있으며, 각각의 판결과 그 판결을 합쳐서 법률이 형성되는 것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유명한 법률가는 혼동스럽게도, 자신들의 관점을 법률 유명론(legal nominalism)이 아니라 법률 존재론(legal realism)이라고 칭하고 있다. 좀 더 문제를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오캄의 면도칼은 단순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simplicity)라고도 불리워지므로, 일부 창조론자 는, 오캄의 면도칼을 이용해서 진화론보다 창조론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신이 모든것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복잡한 구조로 설명하는 진화론보다, 훨씬 단순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캄의 면도칼은 '단순한'  가정이 더 좋은 가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캄의 면도칼은, 현명하지 못한 대중에게는 대단히 무딘 면도칼이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산 삭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은 돈을 들인다면 낭비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오캄의 면도칼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가정"이라는 단어를 제거함으로써, 오캄의 면도칼을 오캄의 면도칼의 원리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것은 숫자가 적다는 말은 양이 적다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오캄은 가정(assumption)을 줄이자는 것이지,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이 원리는 완전성이란 것은 곧 간결성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이 개념은, 우리들이 중세나 고대그리스인 등과 공유하는, 형이상학적 편견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도 그들처럼, 원리 그 자체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물론자에게 있어, 이원론자는 불필요한 다수성을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원론자에게서는, 정신과 육체를 가정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무신론자에게서는 신과 초자연적 세계를 전제로 하는것은 불필요한 다수성이다. 하지만, 유신론자에게는, 신의존재는 꼭 필요한 것이다. 다른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아마, 폰 데니켄에게는, 아마 사실을 설명하는데 외계인을 가정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우주인은 불필요한 다수성이다. 결국에는, 오캄의 면도칼은, 아마 무신론자에겐 신이 불필요 하고, 유신론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원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편, 오캄의 면도칼이 믿기 어려운 설명과 확실해 보이는 설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에는 확실해 보이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이 원리는 불필요하다. 이것은 보통,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원리가 진짜 청빈주의자(minimalist)의 원리라면, 환원론적인 일수록 더욱 좋은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검약의 원리는 오캄의 전기톱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것의 주요한 사용 목적은 실재론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 : toshijun
출처 : http://www.rathinker.co.kr/skeptic/occam.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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